송원배 대표 당신은 어디에 사십니까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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작성자 관리자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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작성일 23-06-14 16:58
“어디 사십니까?”
“어느 아파트죠?”
“우와! 좋은 데 사시네요.”
사는 집이 경제적 지위를 말해주는 시대가 됐다. 값비싼 아파트에 사 는 사람들에게는 자랑스러운 대답이 기다리겠지만, 그렇지 않은 사람에 게 ‘어디 사느냐’는 질문은 차라리 도발적이고 무례하다.
물질만능주의 속에 사는 우리는 누군가의 능력을 가늠할 때 쉽게 경제 적인 척도를 들이민다. 고급 자동차와 비싼 주택에 명품까지 두른 사람 이라면 마치 대단한 능력자처럼 비쳐진다. 자본주의에 사는 우리는 더 우 월한 관계를 위해 끊임없이 경쟁한다. 더 많은 물질을 갖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고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.
‘하루 세끼 밥만 먹을 수 있다면….’, ‘단칸방이라도 편히 쉴 수 있는 내 집만 있다면….’, ‘취업만 할 수 있다면….’ 아주 작았던 우리의 소망들은 그것을 이룬 지금 더 큰 욕심의 숫자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.
톨스토이의 단편소설 『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』에서는 인간의 욕망을 잘 표현하고 있다. 그 내용을 인용해 본다.
“우리 농부들은 땅만 넉넉하다면 악마나 다른 그 누구도 무서워할 것 이 없다”는 말을 듣고 악마는 화가 치밀어, 땅을 넉넉히 주고 그 땅으로 농부를 미혹하리라 결심했다.
어느 날 누군가 소유한 대지를 내놓자, 그 농부는 그동안 저축한 돈 과 친척들에게 빌린 돈으로 대지를 사들여, 그토록 소원하던 땅 주인이 된다. 처음에는 그저 행복했지만, 오래가지 못하고 고민이 생겼다. 다 른 농부들의 가축이 땅을 침범해 농작물이 피해를 입고 잡음이 생기자, 그는 이 땅이 좁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.
그는 해마다 풍년이 되는 비옥한 넓은 땅을 찾아 고향을 떠나 이주했 다. 그가 가진 땅은 이전의 세 배가 되었고, 살림은 열 배나 나아졌다. 생활은 풍요롭고 살림이 늘어나자 이곳 역시 좁게 느껴졌다. 더 넓은 땅을 소유하고 싶어졌다.
그러던 중 그는 작은 돈으로 아주 넓은 땅을 살 수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. 그곳은 문명이 닿지 않은 원주민이 사는 땅으로, 땅을 얻는 방법도 간단했다. 시작점에서 출발하여 원하는 땅을 괭이로 표기하고 해가 지기 전에 시작점으로 돌아오면, 표기한 모든 땅을 소유할 수 있 게 되는 것이었다.
그는 시작점에서 출발해 마음에 드는 땅을 표기하며 걸어갔다. 출발 점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마다 놓치기 아쉬운 땅들이 있어 포기할 수 없 었다.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해가 지고 있었고, 그는 죽을힘을 다해 달 렸다. 힘들어서 땅을 포기할까 생각도 했지만, 언덕만 넘으면 된다는 생각에 고통을 참고 계속 뛰었다.
드디어, 고꾸라지며 극적으로 도착점에 다다랐지만 그는 숨을 거두 고 말았다. 악마는 미혹의 덫에 빠져 숨을 거둔 그를 보며 키득키득 웃 었다. 결국 그는 머리에서 발끝까지만큼의 필요한 땅만 갖게 되었다.
오늘날 우리는 자본주의 자유 시장경제 체제에 익숙한 듯하지만, 참 다운 인간본성을 갈구하는 불편한 진실이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다. 현 실은 물질을 숭배하지만, 마음 한편에서는 사람답게 살고 사람의 관계 에 정성을 다하고자 노력하는 숨겨진 마음이 있다.
백 년 전, 나라의 모든 근간은 유교였다. 유교는 인간의 삶을 충실하게 하는 데 힘쓰기를 강조한다. 인간의 삶이 얼마나 실존적 깊이를 가지며 어떠한 의미를 가지느냐가 중요한 관심사였다. 인간이 마땅히 가야 할 길을 도道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‘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.’ 는 말처럼 인간다움, 성찰과 깨달음으로 인격적인 성취를 이루는 것에 인생의 의미를 두었으며 인간성을 수양하는 목표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.
누군가 어디 사느냐고 물어올 때 우리는 답하기 어려운 처지에 직면 하게 된다. 무슨 아파트라고 답하면 몇 평에 거주하느냐고 물어볼 것이 다. 더 나아가서 어느 동네에 살고, 지은 지 몇 년 되었느냐고 또 물어온 다음, 집은 한 채만 있는지 다른 몇 채가 있는지, 분양권 투자해둔 것은 없는지…. 아파트가 의인화되어 나의 주체가 되어가는 셈이다.
집은 사람이 사는 곳이다. 그런데 왜 이렇게 인간 욕망의 대상이 되어 야 하는가? 조선 유학자 송순의 시조를 음미해보자.
십 년을 계획하여 초간삼간 지어내니
나 한 칸, 달 한 칸, 청풍淸風 한 칸 맡겨두고 강산江山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다
얼마나 절제된 마음인가. 십 년 동안 준비하여 집 하나 마련했는데 달 에게도 바람에게도 한 칸씩 내어주고 강산은 들일 곳 없으니 혼자가 아 니라 함께 보자고 한다. 물질이 미혹하게 하더라도 본성의 인간다움으 로 지켜내야 할 우리 내면의 성찰이 요구되는 시절이다.
“어느 아파트죠?”
“우와! 좋은 데 사시네요.”
사는 집이 경제적 지위를 말해주는 시대가 됐다. 값비싼 아파트에 사 는 사람들에게는 자랑스러운 대답이 기다리겠지만, 그렇지 않은 사람에 게 ‘어디 사느냐’는 질문은 차라리 도발적이고 무례하다.
물질만능주의 속에 사는 우리는 누군가의 능력을 가늠할 때 쉽게 경제 적인 척도를 들이민다. 고급 자동차와 비싼 주택에 명품까지 두른 사람 이라면 마치 대단한 능력자처럼 비쳐진다. 자본주의에 사는 우리는 더 우 월한 관계를 위해 끊임없이 경쟁한다. 더 많은 물질을 갖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고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.
‘하루 세끼 밥만 먹을 수 있다면….’, ‘단칸방이라도 편히 쉴 수 있는 내 집만 있다면….’, ‘취업만 할 수 있다면….’ 아주 작았던 우리의 소망들은 그것을 이룬 지금 더 큰 욕심의 숫자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.
톨스토이의 단편소설 『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』에서는 인간의 욕망을 잘 표현하고 있다. 그 내용을 인용해 본다.
“우리 농부들은 땅만 넉넉하다면 악마나 다른 그 누구도 무서워할 것 이 없다”는 말을 듣고 악마는 화가 치밀어, 땅을 넉넉히 주고 그 땅으로 농부를 미혹하리라 결심했다.
어느 날 누군가 소유한 대지를 내놓자, 그 농부는 그동안 저축한 돈 과 친척들에게 빌린 돈으로 대지를 사들여, 그토록 소원하던 땅 주인이 된다. 처음에는 그저 행복했지만, 오래가지 못하고 고민이 생겼다. 다 른 농부들의 가축이 땅을 침범해 농작물이 피해를 입고 잡음이 생기자, 그는 이 땅이 좁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.
그는 해마다 풍년이 되는 비옥한 넓은 땅을 찾아 고향을 떠나 이주했 다. 그가 가진 땅은 이전의 세 배가 되었고, 살림은 열 배나 나아졌다. 생활은 풍요롭고 살림이 늘어나자 이곳 역시 좁게 느껴졌다. 더 넓은 땅을 소유하고 싶어졌다.
그러던 중 그는 작은 돈으로 아주 넓은 땅을 살 수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. 그곳은 문명이 닿지 않은 원주민이 사는 땅으로, 땅을 얻는 방법도 간단했다. 시작점에서 출발하여 원하는 땅을 괭이로 표기하고 해가 지기 전에 시작점으로 돌아오면, 표기한 모든 땅을 소유할 수 있 게 되는 것이었다.
그는 시작점에서 출발해 마음에 드는 땅을 표기하며 걸어갔다. 출발 점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마다 놓치기 아쉬운 땅들이 있어 포기할 수 없 었다.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해가 지고 있었고, 그는 죽을힘을 다해 달 렸다. 힘들어서 땅을 포기할까 생각도 했지만, 언덕만 넘으면 된다는 생각에 고통을 참고 계속 뛰었다.
드디어, 고꾸라지며 극적으로 도착점에 다다랐지만 그는 숨을 거두 고 말았다. 악마는 미혹의 덫에 빠져 숨을 거둔 그를 보며 키득키득 웃 었다. 결국 그는 머리에서 발끝까지만큼의 필요한 땅만 갖게 되었다.
오늘날 우리는 자본주의 자유 시장경제 체제에 익숙한 듯하지만, 참 다운 인간본성을 갈구하는 불편한 진실이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다. 현 실은 물질을 숭배하지만, 마음 한편에서는 사람답게 살고 사람의 관계 에 정성을 다하고자 노력하는 숨겨진 마음이 있다.
백 년 전, 나라의 모든 근간은 유교였다. 유교는 인간의 삶을 충실하게 하는 데 힘쓰기를 강조한다. 인간의 삶이 얼마나 실존적 깊이를 가지며 어떠한 의미를 가지느냐가 중요한 관심사였다. 인간이 마땅히 가야 할 길을 도道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‘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.’ 는 말처럼 인간다움, 성찰과 깨달음으로 인격적인 성취를 이루는 것에 인생의 의미를 두었으며 인간성을 수양하는 목표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.
누군가 어디 사느냐고 물어올 때 우리는 답하기 어려운 처지에 직면 하게 된다. 무슨 아파트라고 답하면 몇 평에 거주하느냐고 물어볼 것이 다. 더 나아가서 어느 동네에 살고, 지은 지 몇 년 되었느냐고 또 물어온 다음, 집은 한 채만 있는지 다른 몇 채가 있는지, 분양권 투자해둔 것은 없는지…. 아파트가 의인화되어 나의 주체가 되어가는 셈이다.
집은 사람이 사는 곳이다. 그런데 왜 이렇게 인간 욕망의 대상이 되어 야 하는가? 조선 유학자 송순의 시조를 음미해보자.
십 년을 계획하여 초간삼간 지어내니
나 한 칸, 달 한 칸, 청풍淸風 한 칸 맡겨두고 강산江山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다
얼마나 절제된 마음인가. 십 년 동안 준비하여 집 하나 마련했는데 달 에게도 바람에게도 한 칸씩 내어주고 강산은 들일 곳 없으니 혼자가 아 니라 함께 보자고 한다. 물질이 미혹하게 하더라도 본성의 인간다움으 로 지켜내야 할 우리 내면의 성찰이 요구되는 시절이다.